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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일본어: 坂本堤弁護士一家殺害事件, さかもとつつみべんごしいっかさつがいじけん)은 1989년 11월 4일에 옴진리교(현재의 알레프)의 간부 6명이 옴진리교 문제를 조사하고 있던 변호사 사카모토 쓰쓰미(당시 33세)와 가족 3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현장에 옴진리교의 배지가 떨어져 있었지만 사건을 담당한 가나가와현 경찰은 "사건과의 관련 부족(事件性なし)"을 내세우며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 범행은 1995년 9월 범인 중 한 명인 오카자키 가즈아키가 자수를 하면서 밝혀지게 되었다.

 

살해당한 무라이 히데오를 제외한 범인 5명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에 소속되어 있던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는 출가신자인 어머니에게서 아들이 옴진리교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 상담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1989년 5월부터 옴진리교의 반사회성을 비판·추궁하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하순, 옴진리교 간부와의 교섭이 결렬되고 사카모토는 옴진리교의 종교법인 인가 취소 등의 민사소송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옴진리교 대표자인 아사하라 쇼코(마쓰모토 지즈오)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활동은 교단에서 출마를 예정한 내년(1990년)의 총선거나 차후 교단의 발전을 방해한다" 라고 생각하고 신도에게 그의 살해를 명했다고 여겨진다.

 

11월 3일, 옴진리교 간부인 무라이 히데오·하야카와 기요히데·오카자키 가즈아키·니이미 도모미쓰·하시모토 사토루·나카가와 도모마사가 사카모토가 출퇴근할 때 이용하는 요코하마 시의 요코다이 역 부근에서 매복해 있다가 자동차로 납치한 후 염화칼륨을 주사해 살해하고 시신을 그대로 방치한 채 가버리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카모토는 이 날이 공휴일이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사하라의 지시에 의해 사카모토의 집으로 향해 다음날인 11월 4일 0~3시 경(未明) 자택에 침입했다. 하시모토가 사카모토 쓰쓰미에게 올라타고 오카자키가 목졸라 죽였으며 니이미가 사카모토의 아내(당시 29세)를 목졸라 죽였고 나카가와가 사카모토의 장남(당시 1세)의 입을 막아 살해했다.

 

사카모토 일가가 실종된 직후 1989년 11월 21일에는 변호사 유지의 단체로서 사카모토 변호사와 가족을 구하는 전국 변호사의 모임이 결성되고 1995년 9월에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사카모토 일가를 구할 수 있도록 일본 전국 규모로 광고지의 배포, 캐러밴 활동이 전개되었다.

 

사카모토의 시신은 니가타현 나다치마치(현재의 조에쓰 시)의 산 속에, 아내는 도야마현 우오즈 시 베츠마타의 베츠마타소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 옆의 산길에, 장남은 나가노현 오마치 시의 히나타야마 산속에 묻혀 있었다.

사카모토의 아내는 1995년 9월 6일, 장남은 9월 10일에 발견됐다. 일가족의 묘소는 가마쿠라에 있는 엔가쿠지의 송령원(松嶺院)에 있다. 야마구치구미 재일한국인 조직원에게 살해당한 무라이를 제외한 범인 5명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 되었다.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아내인 미야코 씨가 시신으로 발견된 곳은 1995년(헤이세이 7년) 9월 6일 산길인 베츠마타소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의 우오즈 시 베츠마타의 초입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발견장소에는 유족이 나무로 만든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 등산도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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